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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브리핑] 김명순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입력 2018-02-28 21:26 수정 2018-03-01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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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김명순' 이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낯선 인물이지만 그는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였습니다.

1920년대 조선 땅에 보들레르와 에드거 앨런 포를 번역해 소개했던 신여성.

"특출하외다.
그 자미(재미)가
결코 비열한 자미가 아니오.
고상한 자미외다."
  - 1917년 이광수의 심사평

등단하면서부터 춘원 이광수의 극찬을 받았던 그는 동인지 < 창조 > 의 유일한 여성 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조선 땅은 '사나운 곳' 이었습니다.

"조선아…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 김명순 < 유언 >

일본 유학 시절, 당시 전도유망했던 한 청년에게 당한 성폭력.

그는 학교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당시 언론은 그 사건을 평범한 남녀상열지사로 치부해버렸습니다.

"한 청년을… 생각하다 못하여
료샤(기숙사)를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고"
- 매일신보 1915년 7월 30일

이후 세상은 작가 김명순을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 이라 낙인찍었고 작품보다는 그의 사생활에 집착했습니다.

"일개의 무절제한 감상주의자" - <신여성> 1924년 11월호
"피임법 알려주는 독신주의자" - <개벽> 1921년 3월호
"남편을 다섯 번 갈고도 처녀 시인 행세" - <별건곤> 1927년 2월호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발버둥 치던 그는 결국 1951년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는 돈이 없어 귀국하지 못했던 그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조선시대 신여성에게 너무나 사나웠던 사회인식.

그 안에서 스러져간, 잊혀져간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아이들이 저 같은 일을 또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배우 엄지영 씨는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고통스러운 피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묻어두고 싶었지만 반복되지는 않아야 했기에…감춰두었던 고통을 드러낸 사람들.

그들에게도 조선은 여전히 사나운 곳이었을까…

감춰진 사실은 또 하나가 있습니다.

촉망받는 작가 김명순에게 성폭력을 가한 가해자.

그는 해방 이후에 군의 최고 자리에 올라 영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김명순을 괴롭혔던 것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권력을 누린 가해자의 모습이었겠지요.

배우 엄지영 씨를 괴롭혔던 것 역시 피해자에게는 참담한 그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사실이었다고 했습니다.
 

조선아…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1924년 김명순이 시로 남긴 이 외침은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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