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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664. 규장각의 저주

입력 2018-01-2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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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청와대 터에 얽힌 비밀을 밝히는 ‘효자동 1번지’를 출판한 뒤 재미있게 읽었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규장각의 저주’ 편은 박정희와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한 인연에 대한 것이었다.

정조의 야심작이었던 창덕궁 규장각 앞에는 부용정이 있다. 정조는 아름다운 연못 부용지에 세운 부용정 정자를 좋아했다. 이곳에서는 정조의 꿈을 실현시킬 규장각이 있는 주합루가 바로 보인다. 그런데 이 부용정에서 술판을 벌인 두 남자가 있었다. 바로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였다.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어갔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4일에 태어났고,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에 태어났다. 모두 ‘14일’에 태어난 것이다. 사망일과 사망의 원인은 아예 일치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 쏜 총에,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도 안가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쓰러졌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지 정확히 70년 되는 날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모두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무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렸고, 박정희는 한국 근대화를 이끈 대통령이었다. 두 사람 모두 헌법을 새로 고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 정부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으며 박정희는 세 번이나 헌법을 고쳤다. 그들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유신에 집착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의 총아로 활동했고, 박정희는 1972년 10월 독재를 위한 유신 체제를 가동했다.

만주와도 인연이 깊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고령의 나이에도 러시아와 철도 협상을 벌이기 위해 만주 하얼빈까지 갔다. 박정희는 잘 알려진 대로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8·15 광복 전까지 만주 관동군에 배치돼 중위로 복무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에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박정희는 만주를 발판 삼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셈이다.

이뿐이 아니다. 둘 다 키가 작고, 재혼을 했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얼마 전 ‘효자동 1번지’에서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44세에 총리가 됐고, 박정희 역시 44세에 군사정변을 일으켜 2년 3개월 동안 군사정부의 수령으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또 이토 히로부미는 67세, 박정희는 63세의 나이로 모두 60대에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도 있다. 규장각의 저주랄까.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안중근에게 피격되기 몇 달 전, 무슨 생각에서인지 규장각에서 책을 대량으로 가져갔다. 그 가운데 단 90권만 1965년 한일협정 때 돌아왔다. 박정희는 이토 히로부미의 반출도서 전권을 회수하지 않았다. 아마 얼마나 가져갔는지 몰랐던 것 같다. 그 책들은 일본 궁내청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지난 2010년에서야 나머지 66종 938권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무단 반출한 지 약 100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규장각의 책 1000여 권을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 직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사망했다. 정조는 자신이 아끼는 부용정에서 술판을 벌이고 목숨보다 아끼던 책들을 훔쳐 일본으로 빼돌린 이토 히로부미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2010년에 반환된 도서가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무단 반출한 책 750권 정도가 일본 황실가에 아직까지 보관 중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해결도 중요하지만 남아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반출 도서들을 샅샅이 찾아 반환받는 문제도 시급하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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