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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큐와 야구]ML 출신 이와무라, "세월호, 한국인에 힘든 날 이어졌을 것"

입력 2017-04-18 06:02 수정 2017-05-1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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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큐와 야구]ML 출신 이와무라, "세월호, 한국인에 힘든 날 이어졌을 것"

“한 경기, 한 경기 전력으로 뛰어 왔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범접하기 어려웠다.”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 10일 현역에서 은퇴한 이와무라 아키노리(38)의 말이다. 그는 두 번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 그리고 일본프로야구(NPB) 14시즌과 메이저리그 4시즌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NPB에선 2014년 야쿠르트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독립리그 후쿠시마 호프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플레이를 이어 나갔다. 이제는 '감독'으로만 뛰는 그와 온라인 인터뷰를 가졌다.

NPB에서 이와무라는 통산 1194경기에 나서 193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선 408경기 16홈런에 그쳤다. NPB에선 홈런 하나를 치는 데 6.2경기면 충분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선 25.5경기였다.

그는 이에 대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무서움’을 언급했다. 이와무라는 “일본에서는 스스로 중심타선이라고 생각했다. 파워도 통한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미국 진출 전 세 시즌(2004~2006년) 이와무라는 홈런 108개를 때렸다. 그러나 2007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선 123경기 7홈런에 그쳤다. 이듬해엔 152경기 6홈런이었다.

[야큐와 야구]ML 출신 이와무라, "세월호, 한국인에 힘든 날 이어졌을 것"


그는 "인코스로 파고드는 제구가 잘된 변화구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첫해 스프링캠프에서 수비 포지션이 정해지지 않았다. 내야수였던 이와무라는 외야수 글러브도 챙기며 도전 의지를 불태웠다. 이에 대해 그는 "수비도 수비지만. 그보다 타석에서 공을 맞추고, 팀이 이기는 타격을 해야 했다. 내가 하던 방식으로 하다가는 망신만 당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타격 폼도 바꿨다. 타격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장타력 감소는 그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았다. "옛날 경험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2014년 에반 롱고리아와 벤 조브리스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두 선수는 탬파베이 시절 동료로 같은 해 미·일 올스타전 출전을 위해 일본을 찾았다. 이와무라는 “그들은 내가 뛸 때의 메이저리그와 지금은 야구 스타일이 달라졌다고 했다”며 “과거에는 60~70%가 속구였다면, 지금은 40% 정도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야구가 달라지면 대응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이와무라에게 '전성기 기량으로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면 어떨까'라고 물었다. 그는 “더 어려웠을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이와무라는 홈런 대신 안타에 집중했다. 2008년엔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72안타를 쳤다. 이해 미·일 통산 200홈런도 달성했다. 이와무라는 당시에 대해 “엄청난 긴장감 속에 뛰었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전쟁 같았다. 웃고 있었지만 내일에 대한 부담감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일본에서 나는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없어도 대체 가능한 선수였다"고 했다.

이듬해 5월, 이와무라는 2루수로 출장한 플로리다전에서 상대 1루 주자 크리스 코글란의 태클에 걸려 쓰러졌다. 이 부상으로 이와무라는 석 달을 뛰지 못했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세 자릿수 경기를 기록하지 못했다. 부상과 재활에 대해 이와무라는 “이전처럼 수비를 할 수 있을까라는 압박감, 일찍 복귀하고 싶다는 부담감에 짓눌렸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세계에서 야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들과 함께 뛰어 봤다는 사실에 만족한다"고 했다.

[야큐와 야구]ML 출신 이와무라, "세월호, 한국인에 힘든 날 이어졌을 것"

무엇을 배워 왔을까. 이와무라는 2011년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복귀하며, 선수 생활 황혼기를 시작했다. 이후 일본 야구의 문제점을 생각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 갔다고 한다. 그가 말한 코칭 포인트는 ‘근성을 버려라’다. 선수가 아닌 코치들이 근성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와무라는 “코치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근성을 버리고, 어린 선수들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티칭(Teaching)과 코칭(Coaching)이 구분돼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티칭은 기술과 지식, 코칭은 의욕과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메이저리그에서 배워 왔다. 이와무라는 "아직도 고함만 치는 어린이 야구 지도자가 많다"고 지적했다.

지금 구단의 연고지 후쿠시마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직접 피해 지역이다. 당시 소속팀 라쿠텐의 홈구장도 지진 당시 피해를 입었다. 이와무라는 후쿠시마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금도 재해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 발전을 위해 뛰고 있다. 그는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지진을 직접 겪으며 바뀐 첫 번째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대지진 이후 이와무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좌석을 만들어 집을 잃은 어린이들을 초청하고, 의류를 기부했다.

이와무라는 “이후 타인의 불행과 참사를 주체적인 시선으로 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고 한다. 또 그는 “구마모토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도 힘든 나날들이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마모토는 2016년 4월 대지진이 발생한 지역이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세월호 참사를 가리킨다. 지난 16일은 세월호 참사 3주기였다. 이와무라는 "한국의 유람선 침몰 사고를 뉴스로 접했다.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와무라는 일본 야구에서 스타였다. 그는 "지금까지의 인생은 '이와무라라는 이름'에 짓눌렸고, 강박관념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이름'을 버리고 일본 야구 문화의 개성과 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했다. 후쿠시마 호프스 감독으로서는 '생각하는 야구선수'를 배출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의 미래에 무운이 깃들길.

서영원(프리랜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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