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10일 인용됨에 따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서 첫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또 대통령으로서 오랜 기간 생활했던 청와대 관저에서 떠나야 하는 상황도 맞이하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6·25전쟁 중인 1952년 2월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육군 소령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사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2녀1남 중 장녀였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1963년 2월에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때부터 박 전 대통령은 영애(令愛)로 18년간을 청와대에서 지냈다.
모범생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성심여중·고교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고 서강대 전자공학과(70학번)를 이공학부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강대를 졸업한 뒤 1974년 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교수가 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1974년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모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하자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22세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대행 역으로 활동하며 모친의 빈자리를 채웠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를 "비록 제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때부터 저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1979년 10월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안가에서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박 전 대통령은 10·26 이후 1개월 만에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18년간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9억원(후에 3억원은 돌려줌)을, 1982년에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성북동 자택을 받기도 했다.
은둔생활을 하면서 방송 등 언론에서는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 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부친의 명예회복을 꾀했지만 공개적인 활동은 거의 자제했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맞으면서다. 1997년 12월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 후보의 패배로 정권은 교체됐고 한나라당은 야당이 됐다.
자신이 정치권에 뛰어든 때는 46세 때인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집권여당 후보를 꺾고 당당히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당시에 대해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구 달서구에 출마했고, '정치인 박근혜'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박 전 대통령은 부총재 시절이던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가 자신이 내놓은 '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 등 당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자 탈당을 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5월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이 총재가 개혁안을 대폭 수용하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재합류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여당 후보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역설적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기회가 왔다. 이후 차떼기 사건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까지 겹치며 한나라당이 최악의 위기 상황에 빠진 것이다.
결국 2004년 4월 총선을 앞둔 3월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 뽑혀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천막당사 설치, 천안 연수원 매각 등 승부수를 띄운 끝에 121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그 공을 인정 받아 박 대통령은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후 대표 재임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2006년 5월20일에는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 11㎝가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등 자신의 몸보다 당을 먼저 생각한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이 이후를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다.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해 비주류로 밀렸다. 그러자 전문가들로부터 개인수업을 받으며 정책을 가다듬고 현장을 다니면서 절치부심했다.
박 전 대통령은 경선방식 등 논란에도 불구하고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차기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친이계와 친박계 간 갈등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특히 2008년 총선을 앞두고는 이 전 대통령과 정면충돌하며 공천에서 측근들이 대거 낙천됐다. 그러자 정당 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쓴 '친박연대'가 등장했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 등 발언을 하며 이들을 간접 지원했다. 이후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 친박계 60여명의 복당을 관철시켰다.
와신상담한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위기에 빠지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당의 전면에 등장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개혁에 착수했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어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선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청와대를 떠난지 34년 만에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의 자격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이자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란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임기 4년차인 올해 오래 인연을 맺어온 최순실과 그 일가의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면서 결국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탄핵에 따른 파면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9~22세까지 13년간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딸인 영애로, 22~27세의 5년간은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28~46세는 은둔생활로, 46~60세에는 국회의원(5선)으로, 61~65세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지낸 박 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이 '탄핵 대통령'이란 참담한 결말로 끝났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