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총 대신 펜을 들고 최전방에 나선 이들이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긴박하게 전하며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긴 포화속의 기록자들! 6.25 전쟁 63주년을 맞아 당시 참전했던 종군 기자들을 초대해 생생한 증언 들어봅니다.
6.25전쟁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실 분들이죠, 한영섭, 김진섭 종군기자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Q. 6.25전쟁발발 63주년, 소회는?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감회가 새롭다. 그 참상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 ]
[김진섭/6.25종군기자고문 : 어제가 오늘같고 그렇다. 8.15 이후 개성서 전투가 많이 있었다. 그때 갔더니 한 장교가 우리를 전선으로 안내했다. 그때보니 북괴군이 상당한 고도 전술을 가졌다. 거기를 구사일생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Q. 6.25전쟁 발발 첫 보도, 당시 상황은?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국내에서 내가 처음 보도했다. 그땐 UP에 잭슨이라는 기자가 먼저 보도했다. 그리고 우리 방송국에서 5시반 무렵 국방부 육군 대위가 와서 38선에서 충돌이 발생했으니 장병은 복귀하라는 메모가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 관련 보도는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래서 보도국장과 다시 협의 후 아침 7시 뉴스에서 방송했다. 시시각각 보도했지만 대비없이 당하는 전쟁이라 그냥 밀리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북한은 총 240대 탱크를 가지고 내려왔다. 우리 군에는 그것을 잡을 포 하나 없었다. 경비용 총 정도 였다. 그래서 우리 병사들이 탱크를 막기 위해 수류탄을 품고 탱크에 뛰어 들었다. 목숨을 바쳐 저지했다. 정부에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정부에서 오보도 많이 나왔다. 27일 아침만 해도 국무회의에서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발표하라고 나왔다.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러자 공보처에서는 그건 아니라고 다시 발표했다. 방송도 갈팡질팡했다.]
Q. 수도 서울 탈환 과정 어땠나?
[김진섭/6.25종군기자고문 : 백인혁 장군이 있던 17연대가 주로 전투를 맞았다. 그때 북한군을 몰아냈다. 그렇다면 전공비 하나 세워줘야 한다. 결과에 대한 훌륭한 업적을 세워야 전투에 참여한 사람이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서빙고가 최고 격전지였다.]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미 육군 7사단과 함께 그때 들어왔다. 그래서 그 전공이 부곽이 안됐다.]
Q. 취재한 내용 어떻게 보도했나?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그때는 KBS가 라디오방송국이었다.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취재했다. 사진기는 별로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Q. 전쟁 취재 중, 여러 번 죽을 고비 넘겨?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10월1일 북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금성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중공군이 오고 격전지가 됐다. 낙동강에서 후퇴하는 패잔병이 많았다. 위험했다. 금성에서 후미진곳을 가는데 일제 사격을 당했다. 내 옆에 병사가 자세를 낮추라고 했는데 갑자기 뒤가 쿵했다. 옆에 병사가 맞아서 넘어졌다. 그러니까 정말 눈이 뒤집힌다는말이 맞더라. 그래서 총을 들고 쏘았다.]
Q.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 어땠나?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수도사단 따라 청진까지 올라갔다. 그때 내가 23살이었다. 근데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청진에서 이틀 자고 철수시작했다. 흥남에서 집결하라는 명령에 흥남까지 왔다. 흥남 철수 작전는 10월 14~24일까지 작전계획이 세워져있었다. 그때 중공군이 개입했다. 2만명의 미군이 포위됐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철수하는 것을 기다리느라 그렇게 기간을 잡았다. 원산은 이미 퇴로가 막혔다. 육로 후퇴할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에 있었다. 철수작전들 들으러 갔었다. 피난민에 대해선 어떻게 할거냐는 말이 나왔다. 10만명이 넘는 피난민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그래서 군병력만 철수하면 그 피난민들은 다 죽는것이었다. 근데 유엔군측에서는 군병력만 철수시키려 했었다. 그래서 김백일 장군이 피난민과 함께 철수하기 위해 버텼다. 다 죽더라도 원산으로 육로로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유엔군이 감동 받았다. 처음에는 미군이 완강했지만 나중에는 피난민을 태우는데 적극적이었다.]
Q. 흥남 철수 작전 "잊을 수 없는 비참한 광경", 이유는?
[한영섭/6.25종군기자회장 : 7천톤 선박 밖에 안됐다. 그래서 가족들이 많이 헤어졌다. 그 배들마다 행선지가 다 달랐다. 그래서 이산이 생겼다.]
Q. 6.25전쟁 종료 후, 훈장 거절한 이유는?
[김진섭/6.25종군기자고문 : 종군기자를 많이했다. 일선에 가보면 일몰 전에 산비탈에 군인들이 앉아있었다. 다음날 전쟁이 나면 다들 사라졌다. 내가 종군기자로 훈장을 받는 것보다 그사 람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방장관이 왜 훈장 받으러 안왔냐고 물었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마 종군기자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외국기자들은 많이 죽었는데 한국기자들은 안죽냐는 비난을 받았다. 사실 우리는 일선에 가면 부대가 움직이면 거기서 떨어지면 잔병들한테 맞아죽을 수 있다. 그래서 부대와 같이 움직였다. 총은 가졌지만 쏘지는 못하겠더라. 사실 외국 기자들은 미안하지만 차사고로 많이 죽었지 일선에서 죽지는 않았다. 서울신문 한기호씨는 나와 서부전선에 많이 나와 서울에 들어왔을때 사진까지 신문에 나왔다. 그것을 본 북한 스파이들이 나와서 그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