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바로가기 프로그램 목록 바로가기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휩싸인 경찰국장…'수상한 1989년'

입력 2022-08-25 18:16 수정 2022-08-30 13:30

1983년과 1989년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핵심은 '노동 단체 간부→대공요원 특채' 배경
자백했다는 89년 7월엔 수사 마무리 수순
국가기록원·검찰에 남은 자료들로 소명해야

크게 작게 프린트 메일
URL 줄이기 페이스북 X

1983년과 1989년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핵심은 '노동 단체 간부→대공요원 특채' 배경
자백했다는 89년 7월엔 수사 마무리 수순
국가기록원·검찰에 남은 자료들로 소명해야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휩싸인 경찰국장…'수상한 1989년'
'프락치 의혹'에 휩싸인 김순호 초대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두 덩어리입니다. 그중 핵심은 '1989년 의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김순호 국장의 옛 동료들 증언과 김 국장 본인의 해명을 종합해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정리했습니다.

김 국장은 왜 인노회 수사가 거의 다 끝나가는 89년 7월 자백했다는 걸까요.

먼저 두 줄기 의혹부터 정리합니다.

◆ 1983년 군 강제징집 당시 프락치 의혹

김순호 국장은 1983년 3월 성균관대 운동권 서클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다 군에 끌려갔습니다. 전두환 군부가 운동권 학생들 '빨간물을 빼고 푸르게 만들겠다'며 추진한 '녹화사업'에 동원된 겁니다. 83년 11월 국군보안사령부 심사로 B급 관리 대상으로 분류됐고, 휴가를 나가 학내 운동권 동향을 파악해오라는 이른바 '프락치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부 언론이 확보해 공개한 당시 작성 문건에 따르면, 김 국장은 학내 이념서클 후배들과의 만남, 방학 활동계획 등을 세세히 보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88쪽에 이르는 이 문건 전체는 현재 국가기록원과 진실화해위에 보관돼있습니다.

당시 김 국장처럼 군에 끌려가 프락치로 활용되길 강요받은 이들은 2천여 명입니다. 일부는 목숨을 걸며 저항했지만, 대부분이 강압과 회유 속 프락치 지시를 따랐습니다. 광주 출신에 카리스마가 있었다는 김 국장을 "운동권 금수저"라 부르며 믿고 따랐던 동문들은 다른 이들과 비교해도 상세해보이는 서술에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 국장 역시 당시 야만적이었던 군부 시대 피해자였단 주장은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 1989년 노동단체 간부 시절 프락치 의혹

김 국장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6년 뒤 벌어진 '잠적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김 국장은 1985년 군 제대 뒤 성균관대 동문들과 부천으로 가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공장 노조 결성과 노동자 단체 행동 방안 등을 고민했다고 당시 동료들은 전합니다. 이후 김국장은 1988년 3월 만들어진 대중 노동운동 단체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에서 부천 지역 '지구위원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1989년 2월, 인노회는 노태우 정권 초 치안본부 대공 수사 라인의 타깃이 됩니다. 소속원들이 불법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재차 영장 청구 끝에 줄줄이 구속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부천 지역 책임자였던 김순호 국장은 처벌을 피합니다. 89년 4월 돌연 동료들과 연락을 끊고 잠적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4달 뒤 김 국장은 1명 뽑는 특채 시험에 혼자 응시해 치안본부 대공요원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잘 설명되지 않는 넉 달입니다. 동료들은 인노회 수사에 정보를 밀고한 대가로 경찰이 된 것이었는지를 두고 수십년을 괴로워했습니다.

〈자료출처 = 이성만 의원실(더불어민주당)〉〈자료출처 = 이성만 의원실(더불어민주당)〉

◆ 핵심은 '1989년' 4개월…인노회 수사 과정 살펴보니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1989년 인노회 수사를 "공안정국의 지옥문이 열린 사건"이라고 표현합니다. 민주화 사회를 표방하며 출범한 노태우 정권 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공안정국의 문을 다시 열어젖힌 사건이 '인노회 수사'였단 겁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터졌고, 치안본부는 대공 수사라인 거물들이 처벌받으며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고도 처벌을 면해 살아남았던 홍승상 전 치안본부 경감이 바로 인노회 수사의 책임자였습니다. 저서 〈현장에서 본 좌익의 실체(2010)〉에서 홍 전 경감은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 만은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우리 모두 살아남기 위해 사건을 착수키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1989년 2월 : 인노회 수사 개시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휩싸인 경찰국장…'수상한 1989년'
· 2월8일 인노회 사무국 요원 6명 연행
· 2월11일 인노회 6명 구속영장 기각
"노동운동 단체에 보안법 적용 안 돼"
· 2월17일 인노회 5명 구속영장 발부

인노회 사건은 노태우 정권 들어 처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 전민련이 세를 불리는 분위기에서, 무리하게 노동 단체에 '이적단체 딱지'를 붙이려는 시도란 반발이 컸습니다.

이 당시 '김봉진'이란 가명을 썼던 김순호 경찰국장은 인노회 부천지구위원장이었습니다. 일부 동료들은 언론을 통해 김 국장이 인노회 활동 전부터 보안사나 경찰의 지시로 프락치 활동을 했을 거란 주장을 내놓고 있지만 이견도 있습니다.

김 국장과 대학 생활부터 강제징집 기간, 인노회 활동까지 함께 했던 가까운 친구 박모씨(성균관대 81학번)는 "당시 구속돼 끌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김순호가 굉장히 얼어붙었던 기억이 난다"며 "밀고 의혹이 사실이라면 수사가 본격화한 뒤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습니다.

◇1989년 3월 : 인노회 수사 본격화

· 3월17일 검찰, 사전구속영장 발부된 인노회 간부 5명 조속한 검거 지시
· 3월23일 인노회 수사 대책회의 (김순호 국장 참석)
· 3월24일 김기춘 검찰총장
"공안사범 검거 위해 성당·정당에도 공권력 투입"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강제수사는 빠르게 확대됐습니다. 검찰에선 구속영장이 발부된 인노회 간부 5명을 찾아내 빨리 감옥에 잡아넣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휩싸인 경찰국장…'수상한 1989년'
위 사진은 수사를 받았던 인노회 안재환 회장이 1989년 6월 경찰에 제출한 자술서 일부입니다. 3월 23일 대책회의에 김 국장(가명 김봉진)이 참석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회의는 김 국장이 참석한 마지막 대책회의가 됐는데, 이 자리에서도 '자주·민주 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는 계획을 도모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자술서엔 주사파 활동 관련 내용을 대책회의에서 논의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두 줄기 프락치 의혹 휩싸인 경찰국장…'수상한 1989년'
◇1989년 4월 : '부천지구장' 김순호 국장 잠적

· 4월 1일 인노회 회원 1명 추가 구속
· 4월 3일 인노회 회원 3명 추가 구속
· 4월 3일 인노회 수사 대책회의 (김순호 국장 잠적 · 불참)
· 4월 29일 인노회 부천지구 첫 연행자 조사

김 국장의 친구였던 박모씨(성균관대 81학번)는 김순호 국장과 마지막으로 본 것을 3월 30~31일쯤으로 기억합니다. 83년 4월 초 김 국장과 함께 군에 강제징집됐던 날을 기억하며, 전역 후 해마다 시간이 맞으면 3월 말쯤 식사를 해왔다는 겁니다.

박 씨 증언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도 김 국장은 주사파 행위와 관련한 어떤 고민도 털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노회 수사망이 좁혀져오는 것에 대해 긴장감을 느꼈지만, 김 국장이 "심취해있었다"고 주장한 주사파 행적에 대해선 언급한 바 없다는 게 박 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었던 4월 3일 인노회 간부 대책회의에 김순호 국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김 국장 대신 부천지구 '위원장 대리'를 맡아 회의에 참석했던 이상근 씨는 "김순호와 같은 집에 살았던 동거인도 인노회 회원이었는데, 그에게도 아무말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며 "위원장의 역할이 큰데 무책임하단 생각을 했다"고 말합니다.

4월 28일, 부천지구에서 첫 연행자가 나옵니다. 박종근 씨(성균관대 81학번)는 조사 첫날 경악했던 순간이 생생합니다. 4월 1일 다른 회원의 조사 때만 해도 텅텅 비어있었다는 부천지구 조직도가 완성돼있었기 때문입니다. 박 씨는 "이 부분을 알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 당시에는 김순호 뿐이었고, 순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박 씨에 따르면 조사에서 경찰은 지구위원장이었던 김순호 국장에 대해 어떤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1989 년 4월 1일 연행된 인노회 회원의 수사기록(체포영장 관련)에 남아있던 조직도. 1989 년 4월 1일 연행된 인노회 회원의 수사기록(체포영장 관련)에 남아있던 조직도.
  1989 년 4월 29일 연행된 인노회 회원에게 제시된 조직도 완성본 1989 년 4월 29일 연행된 인노회 회원에게 제시된 조직도 완성본
박종근 씨는 조사에서 풀려난 뒤, 5월 초쯤 김순호 국장이 있는 곳을 찾아냅니다. 김 국장을 직접 만나 마음 속 의심을 풀거나 굳히고 싶었다고 합니다. 경찰 수사를 피해 달아났다는 김순호 국장은 부천에 사는 가족인 누나 집에 지내고 있었습니다. 박 씨는 대화를 구체적으로 기억하진 못 하지만, 김 국장이 "니가 여길 왜 왔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기억합니다. 수사는 힘들지 않았는지, 수사 내용은 뭐였는지 캐묻지 않았다 합니다. 가까웠던 두 사람은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박 씨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채 돌아나왔다고 말합니다.

◇1989년 5~7월 : 인노회 회장 구속, 수사 마무리

· 6월5일 안재환 인노회 회장 구속
· 6월17일 공안합동수사본부 해체
· 김순호 국장 "89년 7월 치안본부 찾아가 자백"

김순호 국장 잠적 이후 4~6월을 거치며 인노회는 사실상 와해됐습니다. 사무국 실무자들부터 중간 간부들까지 줄줄이 구속되면서, 자금 조달로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부천지구위원장 대리였던 이상근 씨는 "당시 현장 노동자들에게 자비를 털어 비용을 지원해줬어야 할 만큼 조직이 망가졌던 시기"라고 기억합니다.

6월 5일엔 치안본부가 '수괴'라고 지목했던 인노회 회장이 붙잡혀 구속됐습니다. 17일엔 2달여 전 출범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해체되면서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이 인노회 등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수사가 마무리 수순에 들어간 겁니다.

김순호 국장의 해명에 따르면, 이 때까지도 김 국장은 경찰에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상근 씨를 포함해 여러 중간 간부들도 붙잡히지 않았고 조사 후 훈방되는 일도 잇따랐습니다. 이듬해까지 인노회 회원 대상 수사가 일선 경찰서에서 진행되긴 했지만, 강제수사나 강도 높은 추궁 없이 사건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김 국장은 치안본부를 찾아가 자백한 건 맞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시점이 7월이라 인노회 사건에 영향을 준 바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모든 회원들과 연락을 끊고 잠적했을 만큼 "두려움을 느꼈다"는 김 국장이, 잠적 후 몇달이 지나 수사가 마무리 된 7월 스스로 경찰을 찾아간 대목이 설명되지 않는단 게 당시 동료들 평가입니다. 7월 말엔 수사 초반 재판에 넘겨졌던 회원들이 실형을 선고받는 등 1심 결과까지 나온 시기입니다. 당시 어떤 계기로 1989년 7월 갑작스럽게 자백을 하게 됐는지 묻는 취재진 질문에 김 국장은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8일 출고됐다 삭제된 TV조선의 홍승상 전 경감 단독 인터뷰 기사에서 "1989년 초 김 국장이 다짜고짜 나를 찾아왔고, 운동권 사건 관련 증거물 분석을 시키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취지로 언급된 내용이 오히려 신빙성 있단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김 국장이 적어도 잠적했던 89년 4월 전후부터 치안본부에 협조해 수사에 큰 도움을 줬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됐을 것이란 전 인노회 동료들의 주장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옵니다.

김순호 행안부 경찰국장과 이상민 장관 〈사진출처=연합뉴스〉김순호 행안부 경찰국장과 이상민 장관 〈사진출처=연합뉴스〉
◆ 경찰청장 "30년도 더 지나 입증 자료 없어"…모든 기록은 검찰에

윤희근 경찰청장은 오늘(2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순호 국장 관련 밀정 의혹 확인을 시도했지만 30여년 지난 사안이라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김 국장의 구체적 특채 사유 등이 담긴 자료는 보존기한이 지나 모두 파기됐다는 게 경찰청 공식 입장입니다.

하지만 당시 인노회 수사 자료가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 수사 자료는 모두 30년 전 사건을 송치받았던 검찰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 국장이 인노회 동료들이 아닌 자신에 대해서만 털어놨다고 주장하는 '자술서'가 의혹을 밝히는 주요 단서가 될 것입니다.

김 국장은 지난 14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홍승상 전 경감에게 인노회 이야기를 한 건 맞지만, 거래를 하진 않았다"며 오히려 "경찰 이력에 문제가 될 수 있어 인노회 관련 진술을 빼줬다"고 해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나마의 당시 진술도 온전히 기록으로 남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 국장이 뜨거운 논쟁 속 힘겹게 문을 연 경찰국 수장으로 역할하기 위해선, 반드시 남은 의혹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행안부 경찰국은 '30년 전 치안본부로 돌아가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국장이 '공안정국을 주도했던 치안본부의 프락치였다'는 의혹을 풀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시민들이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광고

JTBC 핫클릭